성장과 태도

아름답던 패자. 그를 추억하며.

연재 029 / 137

중학교 3학년 시절이었다.

꽤 무더웠던 초여름의 날씨였던 걸로 기억을 한다.

더운 여름에 북적이는 버스를 타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어서, 꽤 일찍 등교를 하는 편이었다.

농구가 붐이었던 시절이라, 농구공을 퉁퉁 튕기면서, 귀에는 이어폰을 끼고 룰루랄라 버스를 내려 학교로 가고 있는 길이었는데, 건널목 저 편에 정장을 입은 한 아저씨가 나를 굉장히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누구지? 왜 계속 쳐다보지?'

주위를 둘러봐도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눈 마주치면 안 되겠다. 빨리 지나가야지.' 하는 생각에 슬슬 뛰어갔다.

그러던 중 건널목을 다 지나갈 때쯤에, 그 아저씨가 갑자기 나에게 악수를 청하셨다.

'오잉... 많이 본 분 같은데...?'

'아...'

그는 내가 살던 지역구의 초선 국회의원으로 정치생활을 시작했었다. 그때는 내가 정치가 무엇인지 모르던 초등학생 때였지만, 그의 이름을 꽤 익숙하게 기억했던 걸로 기억한다.

재선에서는 낙선을 했었고, 이후 내가 살던 지역의 시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결국 낙선했다.

그날은 시장선거에서 낙선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다.

"안녕하세요. ㅇㅇㅇ입니다. 학교 참 일찍 가네요. 공부도 열심히, 운동도 열심히 하세요.

감사합니다."

아직까지 그날의 기억 속에 그에 대한 잔상은

'깊게 파인 주름, 굉장히 잔잔한 미소'였다.

연예인을 봤었다면, 아마도 학교에 돌아가서 친구들에게 엄청 자랑을 했을 터인데, 그때에 나는 정치인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던 시절이라 딱히 주변에도 이야기하지 않고 지나갔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유달리 그날 아침의 기억은 꽤 강렬하게 남아있다.

그렇게 잊혔던 그를 다시 소환했던 것은, 2002년이었다. 당시에 해군에서 군생활을 하던 나는 책 읽기와 글쓰기를 꽤 좋아했었는데, 해군 장병 대상 호국문예에서 2위를 했었다. 당시 친하게 지냈던 정훈장교께서 부대의 명예를 높여줘서 고맙다고,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말하라고 하셨다. 정훈실에 당시에 부대장이셨던 분께서 매달 구독하시는 '월간 xx'이라는 시사매거진이 가득 쌓여있는 것을 보았다.

"저거 다 보신 거면 제가 읽겠습니다." 하고 2년 치의 엄청난 양의 시사잡지를 갖고 갔다.

정치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고 무지했었던 시절이었는데, 너무나 흥미로운 분야라는 것을 그때서야 깨닫게 되었다. 이틀 만에 한 권을 독파하고, 거의 1달 만에 월간 시사잡지 2년 치를 다 읽었던 기억이 난다. 거의 정독으로. 군 입대 전후의 국내 정세와 정치 판도에 대해 스토리 라인으로 이해하게 되고, 대선을 앞둔 시점이라 더더욱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 시즌이어서 그랬는지 모른다. 더군다나 나의 첫 번째 대선 투표를 행사하는 시점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내가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었던 건, 우리 지역구에서 정치를 시작했고, 시장선거에서 낙선하고 학교 앞 건널목에서 인사를 했던 그분이, 당시 여당의 국민경선 후보로 나왔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그분은 대통령 후보가 될 가능성이 높지 않은, 중위권 후보였다. 그런데 영화 같은 일이 벌어져서, 그분이 여당의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 이후에 타 정당 후보와 단일화 진행 및 파기가 되고 우여곡절이 많았었지만, 결국 그는 16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었다.

인물에 대한 평가를 하려는 것도 아니고, 정치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의 유년시절 기억에서, 더운 날 아침 유권자도 아닌 어린 학생에게 당선 축하 인사도 아닌, 낙선을 했지만 감사의 인사를 전하던 그 모습이 시간이 지나서 생각해보니 굉장히 멋진 모습이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도 지나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내가 낙심하거나 힘이 들 때, 그러한 감정을 주변에도 풍겼던 적은 없는지 무심코 하는 말과 행동으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거나 한 건 없는지 반성을 해보고 배려하는 말과 행동, 의연한 태도로 상대방에게 좋은 기억과 향기로 남아있도록 노력하자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날 이후로 직접 본 적도 없고, 이제는 볼 수도 없는 인물이지만

'깊게 파인 주름과, 잔잔한 미소'는 꽤 오랫동안 기억이 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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